윤희성 칼럼 -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평판
윤희성 칼럼 - 죽림칠현(竹林七賢)과 평판
  • 윤희성 브랜드평판 전문위원
  • 승인 2018.07.19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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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학생때부터 배우고 알고 있는 “죽림칠현”은 속세를 초월한 고고한 사람쯤 일 것이다.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조차도 알고 있는 고고한 “죽림칠현”에 대해서 이견을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확실한 “평판”을 가진 위인들이고, 이렇게 우리는 1,700년 동안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작은 한반도 땅에 있는 우리는 물론이고, 13억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은 지금도 자화상으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위인들이다. 어찌보면 동양 역사상 거의 최초로 사회적 평판을 가진 그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조금 고리타분하지만, 그러면 죽림칠현에 대해서 조금 더 들어가 보자. 

"중국 위(魏)·진(晉)의 정권교체기에 부패한 정치권력에는 등을 돌리고 죽림에 모여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청담(淸談)으로 세월을 보낸 일곱 명의 선비. 중국 위나라 말기 실세였던 사마씨 일족들이 국정을 장악하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등을 돌리고 노장의 무위자연 사상을 심취했던 지식인들을 일컫는다. 당시 사회를 풍자하고 방관자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정치와는 무관하였다. 그중 유명한 7인을 죽림칠현으로 부르는데 그들의 이름은 완적(阮籍)·혜강(嵆康)·산도(山濤)·향수(向秀)·유영(劉伶)·완함(阮咸)·왕융(王戎) 이다. 그들은 개인주의적·무정부주의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신봉하여 지배권력이 강요하는 유가적 질서나 형식적 예교(禮敎)를 조소하고 그 위선을 폭로하기 위하여 상식에 벗어난 언동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이들은 위(魏)나라를 멸망시키고 진(晉)나라를 세운 사마씨의 일족에 의해 회유되어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들 중 혜강은 끝까지 사마씨의 회유를 뿌리치다 결국 사형을 당하였다."

이 정도가 우리가 아는 죽림칠현에 대한 교과서적인 정의이다. 즉 그들의 역사적 “평판”이다.

여기서 새삼,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0년 전에 있었던 위인들의 평판을 끄집어 내는 이유는 “평판”이란 가치의 소중함과 왜곡된 모습, 그리고 역사에 까지 미치는 영향을 알고자 함이다.

우선 그들이 과연 세속에 초탈하고 과연 일관되게 무위자연을 노래하며 자연 속에 파묻혀 살았는지에 대해서 여러 서적들이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윤희성 문화평론가
윤희성 문화평론가

 

정말 속세에 초탈하였나?

그렇지 않았다라는 게 정답일 것이다. 이건 그들의 역사적 “평판”을 시샘해서 하는 말이 아닌다라는 것을 여러 문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 하나, 산도가 혜강에게 관직을 하나 제안한다. 사실 죽림에서 세상과 등진다고 했을 뿐이지, 기본적으로 출중한 능력들이 있었던 지라, 이들에게 관직은 늘 곁에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중에 꽤 일직부터 관직에 있던 산도가 자기가 눈 여겨 보던 혜강에게 관직을 나서기를 청한 것이다. 이쯤에서 미이리 말해둘 게, 죽림칠현이라고 해서 모두 동년배이거나 비슷한 연배라고 생각할 지 모르나, 사실 이들 사이에 꽤 나이차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한 산도와 혜강만해도 산도가 18살 손위라는 점이다.

이 정도 나이 차이라면, 지금으로 쳐도 자식뻘이고, 실제로 오랜 시간 동안 혜강이 산도로부터 죽림에서 가르침과 도움을 받았기에, 이런 귀한 제안을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헤강은 이런 산도의 제의를 무려 4년간 고민하다가 거절한다. 그리고 심지어 산도와 절교까지 하게 된다.

사단은 산도가 제안한 관직의 자리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혜강이 받아 들이기 어려웠던낮은 직위가 문제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무려 4년간을 고민하면서, 고민의 일단을 불의한 시대에 타협하지 않는 참 선비의 모습으로 포장하고 유려한 문체로 글들을 써 남기면서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혜강의 강직함과 능력을 잘 아는 산도로서는, 결코 낮지 않고 산도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관직을 추천했음에도, 그의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결과임이 확연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상황이 이럼에도 혜강은 산도가 죽림에서 자기와 함께 했던 도덕적인 약속을 저버렸다는 이유를 들어 죽림에 남게 된다.

“대장부의 뜻과 기개는 부탁을 할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속세 사람들이 모두 부귀와 영화를 쫒는다 해도, 나만은 이를 멀리 할 수 있다는 사회적 “평판”이 그를 1,700년동안 각인시킨 순간이다.

과연 이들은 영원한 방랑자(放浪者) 였을까?

우리가 흔히 노장사상(老莊思想)하면 유유자적하며, 어느 속세에 욕심갖고 머물지 않고, 자유스럽게 시와 노래를 즐기며, 자연 속에서 자기 생각에 심취하는 모습이 연상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죽림칠현은 이름부터 이런 모습에 딱 어울린다. 이처럼 역사상 적합한 작명을 찾기도 쉽지 않을 정도이다.

이들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된 것처럼, 실제로 나이차도 많고, 서로가 갖고 있는 취향과 성향이 크게 다름에도, 요즘 흔히 말하는 “야자타임’은 저리 가도록 잘 어울리고 잘 놀았던 사이였음에는 틀림없었던 것 같다.

그런 그들은 과연 정말 초야(草野)에 머문 방랑자들이었을까?

오랫동안 은둔하는 은둔자는 대게 산수외 관련이 깊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깊은 산속인 만큼, 사람의 접근도 용이치 않고, 또 흐르는 물에는 펄적 뒤어 오르는 물고기도 있고, 깊은 산속에는 수북히 쌓여있는 낙엽들이 있어서, 속세와 거리를 두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요즘 방송에 많이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와 같은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될 터이다.

그런데 실상 죽림칠현의 은둔은 “보통은둔”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던 것 같다. 이들의 이야기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다름아니 조정에 숨어 지내는 “큰 은둔”이라는 거다. 한편으로는 벼슬을 하면서, 또 한 편으로는 은둔자인 이중적인 상황임을 즐기는 데도, 세상사람들은 그들을 방랑객 또는 은자(隱子)정도로 칭송해 주니 얼마나 호사를 부렸는지 알 수 있다.

부친이 유명한 문인이었던 완적은 그저 초야에 머물러 있던 인물이라고는 할 수 있을지언정 은자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은둔이라는 것은 벼슬에 나서는 것에 상대적인 말로, 벼슬을 거절해야 비로소 그 뜻을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34세 이전에 벼슬길에 나선 적이 없다고 해서 완전히 벼슬길에 들어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완적이 벼슬에 대한 생각을 희석시킨 면이 있지만, 이 세상에서 경륜을 펼쳐보리라는 뜻은 항상 갖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그는 비록 벼슬길에 나설 수 있는 과거급제 같은 길을 걷지는 않았지만, 이미 충분히 “명성”을 갖고 있었기에 언제나 벼슬길을 더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보통의 벼슬을 한 선비가 고관이 되고, 명성을 날리는 관리를 되려면 비교적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완적은 그런 관직을 충분히 할 수 있는 “명성”을 이미 갖고 있는 상태에서, 수도 없는 조정의 부름을 거절하며 몸값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어느정도 “명성”을 쌓고 있던 완적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았다. 지금으로 치면 청와대 자문쯤되는 장제라는 자가 그의 재능과 성품을 보고, 그를 지금의 장관으로 지명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를 완적이 물리치는 편지를 써서, 청와대 같은 곳의 문 앞에 던져 넣었다. 그런데 이를 들은 장제가 불같이 화를 냈고, 그의 소환에 화를 당할 지도 모른다는 주변의 염려를 듣자마자 완적은 바로 장관직을 받아 들인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완적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았고, 비록 남보다 적지 않은 생각과 깨우침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도, 현실세계의 경험이 부족했기에, 일처리가 능숙하지 못했다. 결국 완적은 장관의 자리에 갔으나, 번잡하고 딱딱한 관료의 업무로 인해 날이 갈수록 정상적인 근무가 힘들엇고, 처음에 관직을 사양했듯이 같은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물론 장제 역시 그의 사직을 받아들였으며, 이제는 더 이상 만류하지도 않았다. 완적은 은자가 되자 다시 자유를 얻었다. 완적이 그 후 어떻게 은둔하면서 방랑자의 생활을 영위했는지는 자세히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그가 좋아했던 일상생활의 습관을 따져보면 음주와 노닐기, 시짓고 낭송하기, 이야기하며 즐기기 등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훗날 사가들이 전했다.

물론 그는 관직에 초탈하여 유유자적 방랑자 생활을 한 죽림칠현의 당당한 일인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 외에도 이들을 비판한 글들은 역사서에서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다.

더 이상 “죽림칠현”같은 “평판”은 힘들다.

이제 와서 그 고고한 죽림칠현의 명성을 훼손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그리고 그런 걸 밝혀 본들, 역사상의 가십(gossip)거리만 될 뿐이다. 단지 “평판”이 이뤄지고 사회 속에서 역사 속에서 굳어지는 과정을 보고 관찰하고 싶을 뿐이다

죽림칠현 때도 그렇고 상당히 최근까지도 사회적 “평판”은 주로 그들이 남긴 글과 자료, 그리고 사회적 여론형성을 좌우하는 파워그룹에 의해서 주도적으로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런 평판이 쌓아지기도 힘들지만, 잘 무너지지도 않는 공고함이 있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기에 주변에 있는 서로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따라서 이런 관계와 관게를 형성할 때, 자연히 서로가 서로에 대한 호감과 비호감, 또는 각자가 가진 기준으로 평가하게 되고, 그러한 구분이 판단의 기준이 되게 마련이다. 특히 사람과의 관계형성에서 유교적 기준과 도덕율이 엄격했던 동양의 사회에서는 특히 유별났을 거라고 보여진다. 즉, 지금과 같이 경영적 트랜드로서의 “평판”이란 개념이 생기지도 않았을 죽림칠현 시대 때 부터도, 동양사회에서는 “평판”이상의 잣대가 엄연히 존재하였다고 보여 지는 이유이다.

즉, 유교적 사상의 뿌리가 짙게 영향을 미치는 동양사회에서의 “평판”은 이미 우리들 마음 깊숙히 자리잡은 심리적 기반구조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평판”이란 경영학적 용어가 돌아다니기도 전부터, 이미 “평판’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고, 스스로 그 영향력의 그늘아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평판”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경우에도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감히 “평판”을 건드리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누구도 1,700여년 동안 죽림칠현의 “평판”을 건들기를 꺼려한 이유이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세상이 변했기 때문입니다.

“평판”의 시대적 잣대

물론 “평판”의 출처를 중시하는 것도 최근의 조류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 사회적 “평판”은 명백히 출처가 분명해지고 있다. 그냥 그 사람 괜찮은 사람이 아니고, 왜 괜찮고 왜 좋은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조금 집단화하여, 위에서 언급한 죽림칠현 같은 그룹이나 기업과 같은 대규모 그룹인 경우에는 휄씬 더 구체적인 숫자로 평가가 가능해 지고 있다. 즉, 과거처럼 집단의 기억으로 스리슬쩍 “평판”을 부여하지는 않게 된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서로가 서로의 “평판’을 요구하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동양적 오랜 관행으로 타인 또는 다른 조직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비판적인 언급을 하는 것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에, 가급적 타인에 대한 비평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최근 까지도, 이를 보정하기 위해서 기업의 인사고과에서 비밀을 보장하고 상대평가를 해달라고 하는데도 정확히 평가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행과 역사적, 심리적 배경은 시대의 변화와 각종 온오프라인 네트워크가 다양해 지면서 변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즉 “평판”의 시대적 잣대가 생겼고, 방법도 구체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람 또는 집단이 왜 괜찮은지, 그리고 왜 싫은지를 구체적인 수치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1,700년동안 요지부동이었던 “죽림칠현”의 고고한 “평판” 역시 바뀔 수도 있는 운명이 되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건, 시대를 초월하여 개인과 사회의 평가와 비판이 활성화 되었고, 특히 SNS의 폭발적인 발달로 개인간의 정보교류가 활발해 졌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좋은 것에 대한 “평판”이 주를 이어 “평판”을 형성했지만, 이제 부터는 그렇지 않은 다양한 정보로도 “평판”이 만즐어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평판”의 흐름과 트랜드가 역사상의 “위인”과 독보적인 일들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평판”의 시대적 잣대는 역사적 사실 조차 편안하지 않게 만들 정도가 된 것이다.

이제부터 “명성”이 스스로를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고, “평판”이 “명성”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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