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핀 리본과 벤데타 가면 뒤 소셜 평판의 힘
머리핀 리본과 벤데타 가면 뒤 소셜 평판의 힘
  • 최규문
  • 승인 2018.05.16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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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질 행태에 대한 을의 반란, 바탕엔 여론의 숨은 지지
대한항공 머리핀 리본을 본딴 촛불집회 지지 디자인(좌)과 직원연대 마크(우)(이미지 출처 : 임태훈 페이스북 2018.5.11 https://goo.gl/ru447X )
대한항공 머리핀 리본을 본딴 촛불집회 지지 디자인(좌)과 직원연대 마크(우)
(이미지 출처 : 임태훈 페이스북 2018.5.11 https://goo.gl/ru447X )

이 리본, 어디서 많이 보셨을 터이다. 얼핏 세월호 추모 리본과 모양은 비슷해뵈지만 색깔이 다르고 쓰임도 다르다. 맞다. 대한항공 여성 승무원들이 머리에 착용하는 머리핀 리본이다. 위에 소개한 이미지(좌)는 한 디자이너가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를 지지하는 뜻에서 만들어 보내온 것이라 한다. 자신도 다니던 직장에서 상사로부터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어 대한항공 사태를 보며 자연스레 공감이 갔다는 사연과 함께. 대한항공직원연대는 이 도안을 수용하여 자신들의 조직 마크(우)를 만들었다.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행태가 하나하나 새롭게 드러날 때마다 대중의 공분이 더해가고 있다.  4년 전 땅콩 회항 사태에 이은 속편 드라마를 보는 듯 많은 이들에게 데자뷰를 떠올리게 한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영화 포스터에 흔히 쓰이는 낚시 구문이다. 이 표어가 대한한공 갑질 행태에서보다 더 적절하게 들리는 경우는 드물 것같다. 도를 넘어선 갑질에 대한 "을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대한항공 직원들을 주축으로 회사의 경영 문화 개선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시작되었다. 빗속에서 진행된 2차 집회를 넘어 다시 3차 집회를 준비한다는 소식이다. 시민들의 성금 참여 열기도 높아 개인 사비를 털어서 첫 집회를 준비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다.

대한항공 직원들의 집회를 대표하는 또하나의 상징은 '벤데타 가면'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2040년 영국을 가상의 무대로 한다. 정치 지도자와 피부색이나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은 ‘정신집중 캠프’로 끌려간 후 사라진다. 거리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든 이들이 통제를 받고 살아가지만 누구도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느 날 밤, ‘이비’라는 소녀가 위험에 처하자 어디선가 한 사내가 나타나 목숨을 구해주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 가면은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다 사형당한 '가이 포크스'의 모습을 딴 것으로, ‘V’라는 이니셜로만 알려진 의문의 주인공이 착용한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사회를 바로잡는 '정의의 사도'를 상징하는 마스크인 셈이다.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주연 'V'의 가면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주인공 'V'의 가면
(이미지 출처: 위키커먼즈 https://goo.gl/cMPV7A )

대한항공 직원들이 가면을 쓰고 촛불집회를 진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안타깝다. 영화를 방불케하는 사측의 치밀한 감시와 그에 따른 불이익 조치가 관행적으로 자행되었고 피해사례가 누적되어 온 탓이란다. 노동자의 권리가 법으로 보장된 나라에서 정당한 요구를 밝힌 것을 빌미로 인사 고과나 처우에 불이익을 주는 것은 명백한 인권 침해이자 법 위반이다. 사측은 집회가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갑작스레 13년 만에 직원들에 대한 상여금 지급 및 임금 인상 등의 조치를 꺼내놓았다고 한다. 자사에 대한 공분이 사회적으로 더 크게 확산되는 것을 막아보려는 미봉책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 갑질에서 시작된 수사가 총수 일가의 조세 포탈, 밀수, 자금 해외 반출 등 탈법, 불법 행위로 확대되고 있어 사태는 오히려 더 엄중해지고 있다.

이번 대한항공 갑질 행태에 대한 직원들의 촛불집회에서 등장한 하늘색 리본과 벤데타 가면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여론과 대중의 지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음을 의미한다. 다수의 국민들이 이들의 촛불집회 개최 비용을 성금으로 후원하고, 이름 모를 개인이 지지의 뜻을 담아 포스터 디자인을 보내온다. 총수 일가의 불법 탈법 행위에 대한 비판 기사를 자신의 SNS로 퍼나르고 공유하며, 청와대와 각 언론을 통해 제재를 청원하고, 사법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이번 사태 확산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이 소셜미디어가 여론 전파와 평판 형성에 미치는 힘이다.

2018년 4월 12일,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가 '김기식'에서 '조현민'으로 바뀌고, 뉴스토픽 실시간 검색어로 "조현민 갑질 논란"이 뜨기 시작했다. 익숙해뵈는 이름! 땅콩회항의 주인공 조현아 부사장의 동생이라는 것과 함께 땅콩회항 사건이 여론의 뭇매를 맞던 시기에 "반드시 복수하겠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낸 장본인이란 사실이 궁금증을 더했다.

인터넷 포털의 실시간 검색어 1위로 뜬다는 것은 그리 반길 일이 아니다. 대형 사건이나 사고, 충격적인 루머가 '바이러스성 이슈'로 터졌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 탓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땅콩이 아니라 '물컵'이 사단이었다. 서울의 한 광고대행사에 일하는 누군가가 인터넷 익명 게시판 [블라인드]에 잠시 올렸다가 삭제한 글 내용이 한 언론에 띄어 불거졌다. 내용인 즉 '얼마 전 조현민 전무가 참석한 회의 도중에 자신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 못하자 '물컵을 내던지고 물을 끼얹었다'는 것. 대한항공 측은 사실과 다르다며 조전무가 직원들에게 보냈다는 사과문까지 공개하면서 해명을 시도했지만 비난 여론은 식지 않았다.

소비자들의 비난이 급증하면서 대한항공 브랜드평판은 급락했다. 

항공사 브랜드평판 빅데이터분석 / 한국기업평판연구소

문제의 회의가 열렸던 건 3월 16일, 직원들에게 사과 문자 메시지를 보낸 건 4월 3일, 페이스북에 조전무 본인의 사과문이 올라온 건 4월 12일 오후였다. 문제는 해당 광고대행사 직원들에게 사과 문자를 보낸 시점이 [블라인드] 게시판에 폭로 글이 올라온 다음날이었단 점이다. 진정어린 자발적 사과였을까 의심받는 게 당연했고, 여론의 질타가 식기는커녕 추가 폭로가 잇따랐다. 결국 물컵에서 시작된 오너 일가의 '갑질 행패'가 가족 전체의 정신 상태가 치료를 요하는 병적인 수준이라는 세간의 평판으로 귀결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건의 최초 촉발 계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블라인드' 라는 모바일 게시판 앱이었다. 이후 수사 확대 과정에서 결정적인 제보를 이끌어 낸 것은 직원들이 만든 '단체 대화방'이었다. 촛불집회를 제안하고 개최하기까지 일련의 과정도 모두 메시지 대화방을 통한 협의로 진행되었다. 이것이 바로 모바일 기기와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진 소셜미디어 시대의 풍경이고, 개개인의 참여가 얼마나 빠르게 '집단의 힘'으로 조직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의미있는 사례이다.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중의 힘이 자발적으로 조직된 사례는 광우병 집회에서 탄핵 촛불집회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에서 여러 차례 찾아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대한항공 직원들의 촛불집회는 '내부자 고발'의 또다른 방식이 가능함을 증명했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거와 같이 어느 한 사람의 자기희생적 '양심선언'이 아니라, '익명의 고발'과 '익명의 제보'일지라도 집단화되고, 여론의 공감을 얻어내면 그 자체가 수사 기관의 행동에까지 명분과 근거를 제공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이번 사건이 터진 4월 12일 하루 대한항공 주가는 전날 대비 6.55%가 떨어졌다.

이는 곧 기업의 평판 자체가 경제적 가치 손실로 직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국내는 말할 것 없고 해외에서도 오너나 대표자의 리더십이 기업 평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평판이 곧 기업의 재무적 가치에 대한 손익으로 직결될 수 있다는 연구사례가 근래 들어 더 빈번히 나오고 있다.

2018년 4월 12일, 대한항공 주가 시세 (이미지 출처: 구글 '대한항공 주가' 검색 결과 화면 캡쳐)
2018년 4월 12일, 대한항공 주가 추이
(이미지 출처: 구글 '대한항공 주가' 검색 결과 화면 캡쳐)

지난 5월 14일, 금융감독원과 은행연합회는 `2018년 주채무계열` 31곳을 발표하며 이들의 재무구조 평가 방법에 기업에 대한 사회적 평판 요소를 반영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통상 재무구조를 평가할 때 국내 계열사 재무정보를 기반으로 한 정량 평가를 중심으로 이뤄져온 게 관행이다. 그런데, 앞으로는 재무구조를 평가할 때 경영진의 사회적 물의 야기, 시장질서 문란행위 등도 반영될 수 있도록 정성평가를 강화한다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해 경영진의 횡령이나 배임 등 위법 행위와 도덕적 일탈행위, 일감 몰아주기와 같은 공정거래법 위반, 분식회계 등을 정성평가 항목으로 추가하고, 그에 대한 배점 또한 ±2점으로 하던 것을 최대 -4점까지 감점만 적용하기로 했다고 전한다. `오너 리스크`가 기업의 평판 저하나 기업 활동을 위축시키는 점을 기업의 재무구조 평가 요소로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이다. 

요컨대, 기업의 평판은 이제 오너 개인이나 임원, 가족 몇몇의 인성이나 품격 차원의 문제로 국한시켜 취급할 문제가 결코 아니다. 평판 자체가 기업의 경제적 가치를 좌우하는 '무형의 자산'이라는 점을 잊지 말고 경각심과 관리 우선순위를 한층 높여야 할 때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으려거든 각별히 새기고 유의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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